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어도어 루스벨트 (문단 편집) ==== 루스벨트 추론(Roosevelt Corollary)[* '루스벨트 계론(系論)'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 19세기 말은 [[제국주의]]적 경쟁이 극대화된 시기였다. [[증기선]]과 [[전신]]으로 대표되는 통신상의 혁명은 제국주의로 하여금 그 활동 무대를 지구 전역으로 확장할 수 있게 했고,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무연화약, 기관총, 강철 대포가 출현함으로써 산업국가와 그렇지 못한 나라 사이의 격차를 극도로 벌렸다. 여기서 대표적인 무기체계가 바로 [[전함]]이었다. [[에릭 홉스봄]]은 이 시대를 가리켜 전함 외교의 시대라고 했는데, 19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시대를 비교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략) 1798년 나폴레옹 군대의 이집트 침략 당시 양국 군대는 장비상으로는 막상막하였다. 따라서 승패는 무기가 아니라, 침략성과 잔혹함, 특히 조직력에 의해 결판났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군사적 측면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균형은 깨졌다. 고성능 폭발물과 증기운송과 같은 수단들이 열강의 식민지 침탈을 손쉽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1880년부터 1930년에 이르는 반세기가 전함외교의 황금시대로 불릴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략)" >----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김택동 옮김, 한길사, 1998, pp. 91-92. 전함의 출현은 미국의 외교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는데, 종전까지 미국의 방어벽 역할을 하던 바다는 더이상 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대서양은 미국으로 유럽의 전쟁을 운송하는 고속 침투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신흥 산업국가인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동아시아의 전통적 강국인 청나라를 [[청일전쟁]](1894~1895)으로 거꾸러뜨려, 태평양마저도 미국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1880~90년대까지 이어진 1차 베네수엘라 위기가 루스벨트의 위기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금광이 발견됐고, 이를 영국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세계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미 해군이지만 당시 미 해군은 세계 해군 순위권은커녕 다 저물어 버린 스페인 해군 정도나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약체 해군이었고, 18세기부터 세계 1위 해군력을 놓친 적이 없는 영국 해군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약체화된 스페인은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아메리카의 스페인령 식민지를 다른 외국에 매도할 가능성까지 있었다. 이는 미국에게 있어 큰 문제였다. 스페인이라면 상대가 가능했지만, 새로 스페인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식민지를 양도받을 나라는 미국이 상대하기 상당히 버거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새로 카리브해에 진입할 유럽 강대국이 독일일 것으로 보았다. 루스벨트는 해군력이 아닌 외교 정책을 통해 미국의 안전을 담보해야만 했다. 참고로 기존 미국의 대외 정책을 대표하던 [[먼로 독트린]]의 내용은 다음의 세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 1. 아메리카 대륙은 어떠한 유럽 열강에 의해서도 미래의 식민지가 될 수 없다. > 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 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 먼로 독트린은 유럽 열강과의 외교전을 뒷받침해줄 무기가 될 수 없었다.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내의 신규 식민지의 확보는 1. 항목으로 방어할 수 있지만, 스페인이 독일에 식민지를 매각함으로써 독일 해군이 미국을 위협하게 되는 상황은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이 다른 나라에 식민지를 양도하는 것은(아직은 발생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유럽 열강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해당하고, 스페인이 독일에 식민지를 양도하는 것도 유럽 국가간의 내부문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루스벨트는 1896년 '루스벨트 추론'이라고 알려진 저작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기존의 먼로 독트린이 아메리카 대륙의 비식민화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1원칙을 고수하자면, 식민지의 양도를 통해 새로운 거대 식민지의 출현을 방기할 수 있는 2, 3 원칙은 포기되어야 했고, 2, 3 원칙을 고수하자면 유럽 국가간의 식민지 거래를 통해 1원칙은 포기되어야 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의 진정한 목표는 1원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먼로 독트린은 '''"어떤 非아메리카 세력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의 누구를 희생의 대가로 삼아 영토 팽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한 선언"이라는 것이다.'''[* <<루스벨트 서한집>> 1., 최정수, , 2001에서 재인용.] 따라서 2 원칙은 포기되어야 했다. 2원칙의 포기는 논리적 귀결로써 3원칙의 포기 또한 요구했다. 식민지의 문제와 따로 떨어진 식민모국의 문제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에 그것을 미국의 방위 정책으로 만들 수 있는 4원칙을 추가했다. 4원칙의 내용은 바로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포기하거나 양도할 경우 그것을 접수하는 나라는 미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먼로 대통령이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기 직전 구상 단계에도 존재했던 조항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실효를 거둘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기에 최종적으로는 제외됐던 부분.] 이는 '''먼로 독트린의 제국주의 이론으로의 변화'''를 뜻했다. 먼로 독트린은 애초에는 미국이 유럽 문제에 이끌려 전쟁으로 딸려들어가는 사태를 방어하기 위한 고립주의 정책의 표명이었지만, 2, 3 원칙이 폐기된 이상은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자국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유럽 문제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 획득을 시도하는 유럽 국가의 행동을 적대행위로 간주함으로써였다. 그리고 이런 천명들은 유럽 국가들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분쟁의 성격을 판단할 권리를 미국에만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1902년 독일은 채무변제를 빌미로 함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를 위협했는데(2차 베네수엘라 위기), [[빌헬름 2세]]는 채무변제를 빌미로 영토를 차지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항변했지만, 루스벨트는 빌헬름 2세의 항변을 무시하고 전 함대를 집결해 일전을 불사한 각오를 보였다. 새로운 먼로 독트린 추론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을 위협하는) 전쟁의 괴물을 좇아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안 된다던 미국의 대외정책은, 전쟁의 괴물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는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어디로도 출동해야 된다는 일방주의로 변화했다. 전함과 전신을 통해 적이 언제든 미국을 침략할 수 있게 된 이상, 미국은 적을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적을 찾아서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 다만 한가지 유의할 점은, 전함 시대 이전에도 제국주의는 활발했다.] 이상 루스벨트 추론 문단의 내용은 최정수, , 2001,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주로 참조해 작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